補記



양식태극권이 京都(수도, 즉 북경)에서 傳承된 史實을 좀더 자세히
조사하고 확인하기 위해 북경시 문물국 문물처, 북경시 문서보관소
明淸자료관, 북경도서관이 제공한 자료를 받아서, 그 당시 양건후공을
초대해서 왕부에 나아가 태극권을 전수하게 한 愛新覺羅.溥倫貝子의
家世배경과,저택소재를 확인하였다.

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老先生이 제공한 《道咸以來朝野雜記》와
50년대의 북경시 지도로부터, 先師 왕영천공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근백년간의, 溥倫貝子왕부의 사제인연에서 비롯된 楊, 汪 兩家의
父子 二代의 사람, 련권(習拳)장소, 련권 경력과 자세한 사정들이,
사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측면에서 실증하였다.


그 당시 태극권은 그 독특한 양생술 때문에 청조(淸朝)의 왕공.귀족 계층에서
풍미하고 있었는데,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溥倫貝子(황제의 아들)는
양가태극권의 외유내강한 기격술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히 양건후공을 초청하여
왕부(王府)에서 권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상금이 풍성하고 총애까지 더해지자
양건후공은 가전 기예를 전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이 기예는 계속 溥倫貝子를 시봉(侍奉)하면서 기예를 배우던 왕부의
관가(管家) 왕숭록公이 마음을 집중하여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서 계승하게 되니,
실로 당시 溥倫貝子는 태극권의 기예에 관심이 있고 계승하는 데는 뜻이
없어서 였다. (實是倫貝子當年 有心栽花 無意揷柳)

그러니, 양식태극권이 京都(경도;북경)에 일맥의 전승자를 두게된 것은
확실히 그 당시 愛新覺羅.溥倫貝子가 제공한 재력(財力), 물력(物力),
시간, 장소 등 여러 요인들이 갖추어진 덕택이었다. 이렇게 보면
愛新覺羅. 溥倫은 이 일맥(一脈)이 전승하게된 공신이요, 왕숭록공은
건후公 태극권의 초기 계승자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汪師(왕영천)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사부께서 어렸을 때에,
사부님 댁과 양건후公 댁이 모두 내성(內城)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양건후公 댁은 남구연(南溝沿)의 북쪽에 있었고, 왕선생님 댁은
東鐵匠胡同에 있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를 얻은데다,
또 사야(師爺)의 명을 좇아서 왕사부님은 소년시절에 매일 楊家에 가서
사야(師爺)께 권가를 익히고, 한가할 때는 사야(師爺)를 도와서
端茶倒水하는것이 양씨자손과 다를바가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니, 사야(師爺)께서는 왕사부님이 부지런하게
즐거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셔서 종종 사부님을 데리고 서쪽에 있는
오래된 묘당에 가셔서 권술을 가르치셨다. 한가할 때에 사야(師爺)께서
倒背着手하시고 오랫동안 묘당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을 주시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왕사부님께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사야(師爺)께
왜 그렇게 바라보시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사야(師爺)께서는 곧바로
권예(拳藝)중에 종(鍾)으로써 사람을 비유한 오묘한 이치를 일일이
명하시어 왕사부님이 활연(豁然)히 깨우치게 하셨다.

사부님께서 전에 사야(師爺)의 방안에서 한 장의 그림 위에
조손(祖孫) 삼대(三代)의 공부 단계를 표시한 것을 보셨는데,
그림 전체에 전부 13층의 층계가 있는데, 제일 높은 곳에는 남천문(南天門)이
그려져 있었고, 제8층계에는 조사야(祖師爺)이신 양로선公의 이름이
표시 되어 있었고, 건후公은 제6층계에, 반후公은 제5층, 소후公은 제4층에 있었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이 그림을 계기로 사야(師爺)께 태극권의 공부(功夫)
등급에 대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건후公께서 답하시기를 제1층은 동경( 勁),
제2층은 능히 용경(用勁)하는 것이요, ......,제13층에 이르면 능히 출신입화
(出神入化)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아울러 양씨가문에는 제13층의 경계에
도달한 사람이 없으며, 자신도 공경(空勁)을 능가하는데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말씀해 주셨다.


청조(淸朝)가 망한 후, 건후公 부자(父子)들은 소방대(消防隊)의
임직(任職)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 만 16세였던 왕 사부님도 스승님을 좇아
소방대에 들어가셨다. 그 후 징보公이 상해로 남하할 때, 양징보公은
소후公에게 소노호(小老虎)란 별명으로 불리던 왕사부님도 함께
동행하기를 바랐지만, 왕사부님은 자녀가 아직 어려서 동행하시지 못하셨다.

1956년 말에 북경시에서는 1957년에 개최되는 제1회 전국민족형식
체육운동회 (全國民族形 式體育運動會)에 참가하기 위하여
무술대를 구성할 운동선수를 선발하였는데, 선사(先師)께서 양식 태극권
문파의 대표로 북경무술대에 선발되셨고, 그 다음해의 전중국비무대회
태극권 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셨다. 선사(先師)의 기예가 높고 뛰어나시고,
여러 차례의 전국무술시합에서 고르게 우승 성적을 거두시니,
많은 사람들이 쉴새없이 몰려와서 배움을 청하였으나, 사부님께서는
양가 초기의 외전(外傳)하지 않는다는 훈계를 정성을 다해 지키셔서
거의 제자를 거두지 않으셨다.



1957년말에, 북경시 무림계의 유명인사를이 시체위(市體委)에
취집(聚集)하여 무협회의를 열었는데, 회의상에서 전수신, 왕협림,
손검운(손식 태극권 현. 장문인) 등이 모두 선사(先師)께 양가태극권의
진정한 요체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때 선사께서는 단호하게 양가의 비밀을 회의상에서 공개하지
못한다고 하셨고, 이것을 계기로 무림계의 인사들은, 선사께서
양가의 절예(絶藝)를 보배로 여기셔서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리시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신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초에 진전(眞傳)이 실전(失傳)될 지경에 이르자, 다행히 선사께서는
뜻있는 인사(人士)의 권유 하에 당초의 양가(楊家) 권비(拳秘)를 지켜야 한다는
약속을 해제하시고, 중국 사회과학원의 초빙을 받아서 권술을 강의하셨다.
장소는 처음에 소예당(小禮堂)이었는데, 나중에 역사연구소로 바뀌었다.

이러한 우수한 기예를 후세에 전하고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
선사께서는 미리 계획하셔서 차례차례 순서있게 권리(拳理)를 강해하시고,
유수(柔手)를 시범 보이시고, 아울러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셔서 책을
저술하시고, 알고 이해하신 것을 동호인에게 공개하셨다.

1987년 봄에 사부님꼐서는 제자 위수인등에게 태극권의 "시기(時機)와
오묘(奧妙)"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같은 해 6월 9일 인민체육출판사가
사부님을 위해서 유수( 手)기법의 녹상대(비디오)를 기록 제작 하였는데,
당시 사부님은 이미 서 계시기도 어려우셨지만 내공은 여전히 혼후(渾厚)하여,
휠체어에 앉아서도 탑수시 몇미터 이상 던져버리셔서 주위에서 보던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셨다.


지난 세월의 일들을 하나하나 회고해 보니,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 무형의
큰 손이 있어서 기예의 일맥(一脈)이 매 시기마다 전승되도록 안배
하는 것 같다. 지금 이 문파의 기예가 비밀시 되어 퍼지지 못하고 실전될
위기에 처하여 대중에게 공개된 것도 역시 역사적 조류(潮流)가 흘러가는 바요,
인심(人心)이 향하는 바이다. 여기에서 삼가 하늘에 계신 선사(先師)의 영령께
위로를 드리면서, 선사(先師)께서 맡기신 바를 저버리지 않고, 선사(先師)의
명(命)이 욕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권예(拳藝)를 전승하는 과정 중에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윗대를 이어 후대로 전해준 역대의 선배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위수인(魏樹人) 謹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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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41-5 음양팔괘문 태극권(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