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閑)
안대회
만나는 사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쁘지요?”라고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으레 “그렇지요”라고 대꾸하다가도 가끔 “한가합니다”라고 넉살좋게 되받을 때는 묘한 쾌감이 뒤따른다. 그만큼 한가한 것, 또는 한가함을 느끼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강박관념이다. 일을 가진 사람,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그렇다.
현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느린 사회인 조선에도 한가로움이 상류사회의 욕구였던 적이 있다. 그 시대에도 복잡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로 인해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이 즐겨 말한 모토는 “인생에서 만족을 꾀한들 어느 때나 충족되랴. 늙기 전에 한가로움 얻어야 그게 진정 한가로움이지”(人生待足何時足, 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였다. 송(宋)나라 때 어떤 역사의 벽에 적힌 시구를 시화(詩話)에서 실었다. 인생의 욕망과 바쁜 질주에서 한숨 돌리고픈 소망이 잘 표현되었다. 정조 때의 명신(名臣) 윤행임(尹行恁)이란 분은 아예 자기 서재를 이 구절을 따서 방시한재(方是閑齋)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퇴근하여 꽃밭을 산책하고 책을 읽는 여유를 즐기며 그 정도면 한가로움의 정취를 얻었다고 자부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 때의 일이다. 그렇게 한(閑)이란 한 글자는 유행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같은 시대의 이용휴(李用休)란 문인이 그런 유행에 일침을 놓았다. 저 한가할 한(閑)이란 글자는 경전에도 실려있지 않고, 성인도 말씀한 적이 없건만 그 핑계를 대고 사람들이 허송세월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과연 ‘논어’를 비롯한 옛 경전에는 한가롭다는 뜻을 가진 한(閑)자가 쓰인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있다고 해야 사이라는 뜻의 간(間)자로 쓰일 뿐이요 한가롭다는 의미는 뒷날 덧붙여졌다. 먼 옛날 사람은 한가롭다는 데 대한 욕망도 개념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한가로움이 생활의, 문화의 욕구로 등장하였다. 이용휴는 이 우주 자체가 한가롭지 않게 늘 운행하므로 사람이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한가로움이란 고상하지만 허황한 목적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사람들이 당일(當日)이 있음을 모르는 데서부터 세상일이 그릇되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오로지 당일에 해야 한다. 이미 지난 시간은 다시 회복할 방법이 없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아무리 3만6000 일이 연이어 다가온다 해도 그날은 그 날에 마땅히 할 일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그 다음날까지 손쓸 여력이 없다.”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된다(當日軒記)’(‘나를 돌려다오’ 편)는 짧은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생 백년 3만6000일에는 그날마다 할 일이 있으므로 미루지 말고 그날 할 일을 그날 하라고 했다. 그러면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며, 한 해가 된다. 만약 당일(當日)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날은 공일(空日)이 된다. 그의 말처럼 한가함에 휩쓸리지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 하는 것이 우주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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