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의 두 스님
정민
학회 발표차 대구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과 술잔을 나누다가 숙소로 돌아온 것은 새벽 1시. 그날 올라올 수도 있었지만 이번 길에 꼭 들르고픈 곳이 있었다. 현풍 비슬산. 《삼국유사》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관기와 도성의 이야기가 나오는 현장이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겨 혼자 숙소를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서부정류장으로 가서 현풍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착해서 아침을 먹고 다시 택시를 탔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 도성암에 도착했다. 아침 8시. 산에는 아직도 안개가 몰려 다니고 있었다.
삼국유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신라 때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거룩한 스님이 있었다.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서 살았다. 서로 1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구름을 헤치고 달빛에 휘파람을 불면서 서로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 하면 산중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하여 굽어 보아 마치 영접하는 사람 같이 하니 관기가 이를 보고 도성을 찾아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 하면 또한 이같이 하여 모두 북쪽으로 기우니, 도성이 이를 보고 왔다. 여러 해를 이같이 하였는데, 도성은 거처하는 곳 뒤편에 있는 높은 바위 위에 언제나 편안히 앉아 있곤 했다. 하루는 바위의 터진 틈 사이로 몸이 솟구쳐 나와 전신이 허공으로 솟아서 가버리니 이른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수창군에 이르러 죽었다고도 한다. 관기 또한 뒤따라서 세상을 떴다. 지금도 두 스님의 이름으로 그 터를 명명하였는데 모두 남은 유적이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몇 길은 되니, 후인이 굴 아래 절을 세웠다.
관기(觀機)는 글자로 풀면 하늘의 기미(機微)를 관찰할 줄 안다는 뜻이 되고, 도성(道成)은 말 그대로 도를 이루었다는 의미다. 천지의 기미를 관찰할 줄 알았던 관기와 도를 깨쳐 깨달음을 이루었던 도성. 위의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에 관한 것이다.
바위 위에 혼자 앉아 있던 도성이 문득 관기 생각을 하면 숲 속의 나무들은 모두 관기가 사는 남쪽고개를 향해 일제히 몸을 숙였다. 관기는 숲 속 나무들이 제게로 몸숙인 것을 보고 깊은 밤중에도 달빛을 따라 구름을 헤치며 도성을 찾아갔다. 이번엔 관기가 도성 생각을 하며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 숲 속 나무들은 그 마음을 얼른 알아차리고 북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도성은 휘파람을 불면서 관기를 찾아 왔다.
비슬산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깔려 있고, 그 위로 달빛이 흐는한 밤이었을게다. 나뭇잎이 저희들끼리 소곤거리며 저 북쪽 암자에서 보내온 소식을 남쪽 고개에 전하면, 달빛을 바라보며 서방정토를 그리던 관기는 훌훌 구름 위를 걸어 친구를 찾아갔겠지. 깨달은 도사들도 서로 보고 싶어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멋지고 굉장한 일이다. “뭐하고 있니. 나하고 같이 놀자!” 허공에 뜻 없이 던진 말이 메아리로 울려 퍼져, 그 소리에 나무들이 도미노가 무너지듯 일제히 한 켠으로 쏠려 가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어 서로 마음이 통하던 거룩하고 아름답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낼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나는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있는 사람들인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 도성암 앞 마당에는 몇 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론 일망무제로 탁 트인 시야가 열린다. 나무 밑에는 ‘이곳은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니 일체 말을 마시오’라는 팻말이 서 있다. 암자 뒤로 도성이 그 위에 언제나 조용히 앉아 있었다던 몇 길이나 되는 그 바위가 거짓말처럼 그대로 서 있다. 산 속의 나무는 지금도 그때를 기억한다는 듯 정상 쪽 관기봉을 향해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고, 암자 뒤 편의 소나무는 반대로 도성암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천년도 더된 옛날의 이야기가 눈앞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옛 사람은 친구를 ‘제 2의 나’라고 불렀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 생각만으로도 텔레파시가 통하는 말이 필요 없는 벗. 그런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침 햇살에 깔깔대던 명랑한 새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천년 전 그 아름다운 우정의 소식을 조용히 그려보았다. 그날 아침 나는 나무 그늘 아래 방석 바위에 정좌를 하고 앉아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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