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경
새들이 떠나간 겨울 숲속은 적막하고 싸늘합니다. 더구나 눈도 시답잖고 오늘처럼 칼바람이 내리치는 날엔 더욱 가슴이 시려옵니다. 그래도 우리 집엔 특별한 식구들이 있어 추위가 한결 덜하고 따스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토종닭과 꿩 그리고 청둥오리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샌 시골에서도 꿩 울음소리 듣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창살에 스며들 무렵, '꿩꿩, 끌끄르릉' 산골짝을 가르는 소리는 꿈속처럼 아련합니다. 그러다가 한낮엔 '꿕꿕 푸드덕' 홰를 치며 목청 돋워 산을 일으켜 세우고, 산울림과 희롱이라도 하면 어린시절 고향 속으로 달려가곤 합니다.
동물의 암수는 대개 수퇘지 암퇘지에서 보듯 이름 앞에 암이나 수를 붙여 부르게 마련이지만, 꿩은 유별나게 까투리와 장끼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까투리는 암컷, 장끼는 꿩의 수놈입니다.
까투리의 색깔은 흑 황갈색 반점에 단조로운 모습이지만, 장끼의 머리는 암녹색, 눈두덩은 붉은 색, 부리와 목둘레엔 흰색, 배 가운덴 흑갈색, 옆구리는 오렌지색으로 화려하고 찬란합니다.
장끼만큼 화려한 수컷을 난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금잔디가 포삭한 묘 자리나 눈 덮인 논배미에서 설설 기어다니다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광경은 불꽃놀이를 보듯, 빛 타래를 걸어놓은 듯 눈이 부시고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장끼가 아무리 '꺽꺽' 울며 푸드덕거려도 까투리는 조신하기만 합니다. 아마 '암탉이 울면 재수가 없다'는 속담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언제나 죽은 듯 엎드려 있습니다. 벙어리매미처럼 울음보가 막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벙어리까투리라 불러도 무관할 듯합니다.
까투리는 장끼의 비해 조용합니다. 화려하고 멋진 꽃 미남이 자신을 위해 시간마다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데 괜스레 나서서 꼴불견을 떨 필요가 뭐냐며 꽃 미남을 자랑스레 올려다 봅니다. 까투리는 장끼가 홰를 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울지도 못합니다. 웃지도 못합니다. 훈남(훈훈한 남자)의 몸짓과 품속을 바라만 봐도 가슴이 따스하고 자지러질 듯 행복이 겨워옵니다.
꿩은 자존심이 강해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야생은 죽어도 끝까지 야생이어야 한다며 마음은 항상 산 속에 가 있습니다. 매일처럼 꿩 장을 드나들며 물과 사료를 주고 눈길을 보내도 쌀쌀맞게 달아나기가 바쁩니다. 하도 얄미워 정나미가 뚝 떨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청소를 하다 빗자루라도 들고 왔다 갔다 하면 종종걸음으로 도망을 치다 철망에 주둥이를 처박기도 하고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야단법석을 피우기 일쑤입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아침모이를 주고 꿩 장을 나오려니 장끼 한 마리 귓바퀴를 할퀴고 파드득 날아오릅니다. 귓속이 알알하더니 윙윙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 내가 잘못이다.' 갑자기 구속과 자유와 조류권이 떠오릅니다. 야생도 조류권이 있다면 자유롭게 살 권리를 줘야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니다. 꿩 장을 열어젖히고 꿩들을 내몰기 시작합니다. 캡틴 장끼가 푸드덕 날아오르니 모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꿩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섭섭함이나 달래려고 화천 오일장에 들렸다가 꿩 장을 돌아봅니다. 이게 웬일일까요. 꿩들이 나를 까무러치게 하려는 모양입니다. 지금쯤 산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어야 할 꿩들이 먹이를 먹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려서부터 사료만 먹고 자라난 것들이 이 엄동설한에 어디가 먹이를 구한단 말인가요.
다시 들어온 꿩들을 보며 기특하고 애틋해 안아주려고 다가서니 꿕꿕거리다 이내 머리를 숙이고 조용합니다. 쌀쌀한 오후의 햇살 한 줌 꿩 장 안으로 들어와 돌아나갑니다. 꿩 장 밖에선 독수리 한 마리가 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머리 위를 자꾸만 빙빙 돌고 있습니다.
출처 ,오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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