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수련 중에 항상 관(觀)을 강조하셔서 자소칼럼에서 관(觀)과 관련한 시를 찾아 보다가 글을 올립니다. 수련이 일천한 제가 감히 관(觀)에 대해 글을 쓰기가 외람스러우나 선생님의 글을 조금이나마 정리해보자는 취지에서 올립니다. 관(觀)은 철학에서나 종교에서도 중요한 개념입니다. 동서양의 인식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작이 많습니다만 천학인 저로서는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논의를 할 만한 역량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행이 병행되어야 견해가 세밀해질 수 있는데 이 점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로 시작하겠습니다.
よく見れば薺花(なずなはな)咲く垣根(かきね)かな。
잘 들여다보니 냉이꽃이 피어있는 울타리일까.
바쇼의 예민한 촉수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냉이꽃을 잡아냅니다. 일상의 타성에 젖어 있거나 너무 흔해서 보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질타하는지도 모릅니다.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잘 보아야 한다는 말이 앞에 있습니다. 열려있는 감성은 기민하게 사물을 포착합니다. 결국 깨어 있지 못하면 사물을 제대로 보거나 들을 수 없습니다. 냉이꽃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물은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감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납니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마지막 구에서 ‘울타리일까’ 라고 표현함으로써 묘한 느낌을 줍니다. 즉 ‘꽃이 나일까 아니면 내가 꽃일까’ 라고 하는 묘한 일체감을 부여합니다. 분석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한 우리는 바쇼의 하이쿠 앞에 당황하게 됩니다. 꽃을 바라보는 주체인 나와, 대상인 꽃 그리고 울타리를 각기 다른 실체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바쇼의 관법(觀法)은 나와 꽃과 울타리가 하나가 되고 아울러 주체와 대상이 만나는 장소가 혼연히 하나가 되는 마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뭔가 아득한 느낌이랄까요, 나와 너가 없기 때문에 꽃을 보는 자신까지도 하나의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립니다.
선생님의 시를 바쇼의 하이쿠를 따라 감상해 보겠습니다. 세밀하게 살펴 보고(よく見れば), 깨인 눈으로 바라본 대상을 새롭게 묘사하고(薺花 咲く), 주객이 하나가 되는(垣根かな) 순서로 시를 나누었습니다. 시 하나하나에 세 가지 모두가 담겨있어 분절해서 시를 감상하는 것이 무리이지만 편법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 자세히 들여다 보면 よく見れば
어떻게 보는 것이 잘 보는 것인가? 시인은 철저하게 보고 무심으로 보자고 합니다.
관(觀) 2006/08/22
관절 하나 하나를 무심으로 바라봄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온몸에 물기란 물기 다 빠져 나갈 때까지 바라보는거다
속 무늬결까지 말라서 부스러지고 바람에 날리자는거다
그냥 바람이 되자
눈빛이 종이 뒷면을 꿰뚫는 것처럼 마디 마디를 꿰뚫고 들어갑니다. 힘이 들어가는 몸의 일부를 살펴 들어가면서 방송합니다. 무심으로 대상을 살펴 들어가는 행위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열려있는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살펴 들어가는 의식과 관절 마디가 하나가 되어 무심으로 몸이 움직이므로 공력은 쌓이지만 바람이 흩어지듯이 동작 하나하나에 흔적이 없습니다.
양만리는 가마(마음)의 문을 열고(비우고) 논의 물에 비친 산꽃을 바라봅니다. 하나씩 하나씩 물에 비친 붉은 꽃들을 세어 보니 산에 핀 꽃과 물에 비친 꽃이 짝을 이루어 같다고 표현합니다. 논의 물에서 산중사를 알아버립니다.
물 속 꽃 그림자(水中山花影)
양만리(楊萬里)
閉轎那知山色濃(폐교나지산색농) 가마 문을 닫으니 어찌 산빛이 짙은 줄 알까
山花影落水田中(산화영낙수전중) 산꽃 그림자 논물에 비친다
水中細數千紅紫(수중세수천홍자) 물 속의 수많은 꽃을 자세히 세어 보니
点對山花一一同(점대산화일일동) 산꽃과 짝이 되어 하나하나가 같구나
--- 냉이꽃 피어 있는 なずな花咲く
철저하게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은 새롭게 보입니다. 일상을 건성으로 보고 넘기지 않습니다. 김치로 숙성되기 위해서 소금간에 배추가 저려지듯이, 탁! 치며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먼저 소금간에 푹 절인 것처럼 잘 보는 관법 수행이 철저해야 합니다. 이제 보이는 배추는 새롭게 시인에게 떠오르는 배추입니다. 쉰 목이 다시 쉬어야 푹 절인 배추처럼 구성진 육자배기가 나오듯이.
靜坐 2007/11/19
김장 배추 소금간에 푹 절여져 있다
뭔가, 한풀 꺽인 모습에 고요가 머문다
옳거니...
보는 대상은 빛 뿐만 아니라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소리를 관하는 것입니다. 누에가 뽕잎을 뜯어 먹는 소리, 저녁 강물 밀려오는 소리를 관하며 시인은 생명이 잉태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됩니다. 일상적인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경이의 한 가운데 시인이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寂(적) 2006/08/22
벽 틈새로 들리는
초잠 자고 난 누에들
뽕잎 뜯어 먹는 소리
저녁 강
겹겹이 물이랑 밀려오는
저 아득한 틈새
생명이 산란하는 소리
삼매(三昧) 2007/03/31
허공 중에
흰 두루마기 걸친
달이 떠있고
동네 어귀
늙은 느티나무
가부좌를 틀고 앉았네
여기서 달은 마치 광배처럼 느티나무를 비추고 있습니다. 늙은 느티나무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새롭게 인식됩니다. 조용한 밤에 말없이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 속 정경이 나타나는 듯 합니다.
무심으로 시냇가에 흐르는 물을 바라보던 왕양명은 물의 흐름을 따라 자신의 마음도 한가하게 흐르는 일치성을 발견합니다. 일치 속에 주객이 원융하니 객체인 달이 이제는 주체로 떠 올라 자신의 옷깃에 소나무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노래했습니다. 흐르는 물에 자신을 잊고, 달을 통한 깨달음이 자신의 몸에 드러나게 되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산 속의 제자들에게(山中示諸生)
왕수인(王守仁)
溪邊坐流水(계변좌유수) 시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노라면
水流心共閒(수류심공한) 흘러가는 물 따라 내 마음도 한가롭다
不知山月上(부지산월상) 나도 모르게 산중에 달이 떠 올라
松影落衣斑(송영낙의반) 소나무 그림자 내 옷자락에 얼룩지고 있다
--- 울타리일까 垣根かな
새롭게 대상을 인식한 시인은 대상과 하나가 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세상의 질곡과 고통은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되고 세상사를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觀2 2009/11/24
곧추서서
내리다 내리다
얼어 붙은 폭포
눈 무게
견디다 견디다
한쪽 어깨 찢어진 설해목(雪害木)
직언 직필하다
박해 받던 조선 선비
시린 등뼈 꽂꽂하게 세우고 선
저 당당한 기개(氣槪)
거기 누구 없소
수직적이고 강건한 남성성과 철저하고 치열한 정신세계를 표현한 조정권의 ‘산정묘지’ 연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삿된 것을 깨뜨려 바른 것을 드러내는(破邪顯正) 지사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딘 촉수로는 세상의 아픔을 느낄 수 없지만 깨어있는 자에게는 세상과 내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반대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에 시인은 외롭습니다. 선생님의 이 시와 조정권의 산정묘지 연작을 갈무리한 ‘독락당’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좋습니다. 조정권은 세상과의 소통보다 일단 정점을 향한 치열한 수행에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독락당(獨樂堂)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대상과의 합일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번집니다. 세상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2009/11/02
누군가
던진 돌이
물속에
가라 앉으면...
물은
숨 한번 가다듬고
가만히 두 손으로
돌을
받아 누이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번지고 번져나가는 원융의 모습을 시인 장석남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水墨정원 9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밭고랑 흙에서도, 밭뚝의 마른 기우쑥에서도, 여기저기서도 중심이 있다는 것을 시인의 섬세하고 우아한 촉수는 지각합니다. 다시 대상의 중심 속에 들어가 나의 중심을 바라보며 주객원융을 보여주던 시인은 대상과 대상을 바라보는 내가 모두 사라진, 그리고 나와 나를 바라보는 대상이 사라진 일체의 모습을 깨닫습니다.
중심 2007/12/22
얼어 붙었는 줄 알았던
서리 내린 밭고랑 흙이 부풀어 올라
밟고 지나갈 때마다 싸그락 거린다
부풀어 오른 흙에도 중심이 있다
밭뚝엔 마른 기우쑥 덤불
길쪽으로 기대어 서서 바람을 기다린다
기대선 기우쑥에도 중심이 있다
곳곳에 있는 중심 속에 들어가 앉아서
내 중심을 바라 본다
어느 한순간
번갯불이 사위를 잠깐 가르듯한 순간
중심도 사라지고 ,이것 저것 다 모두 사라지고
바라 본다는 나도 없다
선생님의 시와 최승호의 시를 비교해 보면서 읽는 재미도 새롭습니다.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
최승호
옥수수밭 너머에 함초롬이 피어 있던 달맞이꽃들이 마른 대궁들로 변해, 묵은 눈 위에 서 있다. 산마루 위로 둥실 떠오르던 달도 초생달로 떴다가 한 조각 그믐달로 지고, 달빛도 적막해져서 흰 눈 위에 서걱이는 마른 대궁의 그림자나 드리울 뿐이다. 묵은 눈 위에 된서리 내리는 겨울, 내 의식의 한 뾰족한 끝이, 달맞이꽃이 사라지고 달맞이꽃을 보던 나도 사라지는, 적멸을 겨눈다.
관법은 사물을 철저하게 살펴들어가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인식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원융하되 결국 주객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경계까지 가야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태극권 수련 중에 긴장이 되거나 힘이 들어가는 부분을 깊이 관해 들어가면서 방송하고 몸을 살피면서, 더 나아가 나의 의식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몸이 움직이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는 자취 하나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야보도천(冶父道川),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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