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模倣)
권술 연마에는 투로를 익히는 과정을 중히여긴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몇년간 권가를 연마하는것이다.
서법을 익히는데도 고래 명적을 반복적으로 임서한다.
일전에 상허 이태준선생의 글을 읽고
난해한 고전 한적을 임서하고서 느낀바가 크다.
옛사람들의 공부방식은 역시 우직하지만 지혜가 서려있는것이다.
아랫글은 상허선생글이다.
완당(阮堂)이라면 표구소까지 뒤지고 다니는 선부공(善夫公)을 따라
모씨저(某氏邸)에 완당 글씨 구경을 갔었다.
행서 8폭 병풍을 족자로 고친 것인데 폭폭이 펼치어질 때마다
낙관(落款)이 있고 없고 진가를 의심할 여지가 없게
신운(神韻)이 일실(一室)을 압박하였다.
그 앞을 그저 떠나기가 너무 서운해
선부공은 미농지(美濃紙)를 빌려 두 폭을 연필로 자형(字形)을 떴다.
'天機淸妙'라는 큰 글자에 '實相妙法巧喩蓮花'란 잔글씨가 두 줄로 아래를 받힌 한 폭이요
다른 하나는 '片石孤雲'에 '至人之心如珠在淵'이다.
완당이 쓴 글씨에 글로도 범연한 것이 없거니와
짧은 문구들이나 천 길의 함축을 풍기고 있다.
불과 2,3문자로되 의도가 대해(大海)같이 무궁한 것,
자형(字形), 한 자체(字體)에 이렇듯 엄연한 조형미가 존재한 것,
사실 공리적으로만 평가하기엔 한자(漢字)는 너무나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모사(摸寫)는 안 했지만 '無盡山下泉, 普供山中侶. 各持一瓢來, 總得全月去' 같은 시구(詩句)는
염불처럼 자꾸 외우고 싶어졌다.
모사(摸寫)는 선부공이 해왔으나 종이에 그것을 먹칠해보기는 내가 먼저다.
도저히 원획(原劃)이 날 리가 없다.
영화필름을 조각조각으로 보는 맛이다.
생동할 리가 없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자형만은 우수하다.
나는 낮에는 집에 별로 있지 못하다. 밤에나 보기에는 더욱 방불하다.
그런데 이 두 폭 24자를 먹칠만 하기에 나는 이틀 저녁에 세 시간 이상씩 걸리었다.
완당이 자유분방하게 휘둘러 놓은 획 속에 나는 이틀 저녁을 갇혀 있었다.
완당의 필력, 필의(筆意), 필후(筆後)를 이틀 저녁을 체험한 셈이다.
천자획(千字劃)은 어떻게, 고자획(孤子劃)은 어떻게 달아난 것을 횅하니 외일 수가 있다.
완당의 획은 어떤 성질의 동물이란 것이 만져지는 듯하다.
화풍이나 서체를 감식(鑑識)하려면
원작자의 화풀, 서체를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자면
보기만 하는 것보다 모사하는 것이 훨씬 첩경일 것을 느꼈다.
완당서(阮堂書)를 아직껏 천 자를 보아온 것보다 이 이틀 저녁 24자를 모사해본 데서
나로서의 완당서안(阮堂書眼)은 갑절 는 셈이라 하겠다.
감식(鑑識)은 모든 비평의 기초일 것이다.
문학도 감식에 어두워선 작자여작품(作者與作品)의 정체를 포착치 못할 것이다 .
비평가가 읽기만 하고 얻기 쉬운 것은 애매한 인상일 것이다. 한번 그 작품을 묘사,
베껴본다면 그 작품은 그 평가(評家)에게 털끝만한 무엇도 가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방에 이처럼 미덕의 일면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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